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지모토 겐지 (문단 편집) === 북한으로 가다 === [[일본]]의 [[도쿄]]에서 [[초밥]]요리사로 일했던 그는 일본 요리사 협회 회장의 주선으로 1982년 일본 식당 안산관의 요리사로 월급 50만엔이라는 조건으로 처음 북한에 건너가 1982년 북한 식당 안산관에서 1년간 일한다는 계약을 하고 북한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는 일본 요리를 그리워하는 [[북송]] [[재일교포]]들이 많았는데, 이들 상당수는 큰손이라서 장사는 매우 잘 되었고, 소문이 퍼져서 김정일을 접대하기 위해 초대소에서 초밥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김정일은 후지모토의 초밥에 큰 만족을 표하면서 그를 만날 때마다 적어도 5만엔 가량의 팁을 두둑이 쥐어주곤 했는데 당시 북한인 요리사의 월급이 겨우 2만엔 정도였다.[* 다만 이건 당시 경제력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이 당시의 일본에서야 2만엔이 잘해봐야 누추한 방 1달치 월세 정도지만, 북한에서는 2만엔을 당시 환율로 계산하자면 100원으로 평범한 직장인 1달치 봉급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베트남에 취직해서 월 100만원 받았는데 해당국가에서 월 100만원이 직장인 치고 많이 받는것이지만, 한국기준에서 박봉인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겐지가 북한 직장인 두세달치 급여를 단박에 받을 정도로 특급으로 대접을 받은것이다. ] 한번은 김정일이 수고했다면서 팁을 집어던지면서 준 적이 있는데 이에 화가 난 후지모토가 팁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정일은 그 사건으로 그를 [[나한테 이런 건 네가 처음이야|더욱 눈여겨보게 되었다.]] 후지모토는 자신이 김정일을 위해서 초밥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자 거물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뿌듯해 하였고 한번은 김정일과 악수를 요청해서 허락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3년 5월에 이르러 안산관 담당자와의 불화로 1년을 다 채우지 않고 귀국하게 되었으나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2천만엔 정도의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고. 이때 김정일에게 작별선물로 송이버섯 통조림을 받고 귀국, 가와고시 시의 유명 초밥집에서 5개월 정도 일하게 되었고 가게를 맡기고 싶다는 제안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최종적으로 2년 정도 일하다가 1985년에 쓰쿠이의 초밥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자신을 고용했었던 조총련 회사인 닛초 무역상사를 통해 다시 북한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한다. 그러다가 1987년, 북한에서 후지모토의 통역을 맡곤 했던 [[림상종]]이 직접 후지모토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서 그에게 다시 북한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후지모토는 이를 반색하며 받아들인다. 북한 측에서는 다시 후지모토를 고용하고 싶다면서 3년 계약을 제안하였고, 당시 30만엔의 월급을 받던 후지모토는 60만엔의 월급과[* 다른 일본인 요리사들의 월급은 40만엔이라서 닛초 무역에서 난색을 표하기도 했으나 후지모토가 자신의 급여를 숨긴다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 퇴직 후 일본에 초밥집을 차려줄 것이며, 30만엔은 현지에서 지불, 30만엔은 일본으로 송금하며 1년에 2번 일본 귀국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하고 1987년 8월부터 다시 북한에서 일하게 된다. 이번에는 [[고려호텔]] 지하의 일식집을 경영하게 되었으며 역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김정일은 후지모토가 돌아왔단 말을 듣고 그를 즉시 불러서 다시 초밥을 만들게 했다. 김정일은 한달에 세번 정도 정기적으로 후지모토의 초밥을 먹었고 그를 총애하여 벤츠를 하사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후지모토에게 10년 계약을 제안하며 기본 월급 50만엔은 물론이고 평양에 초밥집을 차리게 해줄 것이며 합영법을 무시하고 그에게 모든 수익을 가지게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지만 후지모토는 일단 좀 더 생각해보겠다고 답변을 회피했다. 후지모토는 자신의 행운에 기뻐했으나 북한 체제의 엄혹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북한 간부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서신으로 누설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문책을 받았으며, 1988년 5월의 일시귀국 때 눈치 없이 김정일에 대한 얘기를 술자리에서 떠들었다가 북한 측에게 걸리는 바람에 김정일에게 사죄서를 바치고 5년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되면서 북한에 완전히 발이 묶이게 된다. 김정일은 후지모토를 눌러앉히기 위해 1988년, 초밥을 만들기 위해 온 후지모토가 가수 엄정녀에게 반하자 이를 눈치채고 위자료를 자신이 내줄테니 일본의 아내와 이혼할 것을 종용하였다. 조총련 측도 후지모토에게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정보를 주며 부추겼고 결국 후지모토는 아내와 통화한 끝에 이미 가족관계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1987년 10월, 조총련으로부터 아내의 바람 소식을 듣고 통화를 해보았으나 도중에 아내가 끊어버렸으며, 이후 1988년 귀국 때는 가족들 중 누구도 얼굴도 안 내밀었다고. 하지만 후지모토는 가정을 팽개치고 북에만 있었는데도 23년이나 결혼생활을 유지해준 아내가 고맙다면서 이 부분에는 말을 아끼고 있다.] 1988년 12월, 김정일의 특별 허가로 일시귀국하여 위자료 3,000만엔과 양육비 1,800만엔을 주고 1989년 1월, 아내와 이혼한다. 귀국 후 후지모토는 충성의 의미로 일본 여권을 당에 바치고 1989년 2월에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엄정녀와 결혼하고 당간부들을 위한 고급 아파트에서 살게 되는데 이 아파트에 현재 [[김정은]]의 집사로 알려진 [[김창선(북한)|김창선]] 등이 살고 있었다. 후지모토의 결혼식에는 김정일, 당 비서인 [[허담]], [[김용순(1934)|김용순]], 부부장 [[장성택]] 등이 참석했고, 후지모토가 헤네시 꼬냑 한병 반을 비우고 기절하자 김정일이 사람을 시켜 후지모토의 음모를 모조리 밀어버리는 장난을 쳤다고. 후지모토가 너무 많은 위자료를 지불했다고 일부 간부들이 볼멘 소리를 했지만 후지모토가 일본의 교육비가 비싸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자 김정일이 후지모토의 편을 들어주며 간부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